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이전 국가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신라]]와 비교 == 신라시대 당시 존재했던 [[진골]]을 포함해 8개의 신분제로 있던 [[골품제]]가 폐지되고, 신라의 강고한 단계별 신분제가 비교적 느슨하고 간략화되었다. 우선 귀족 계급이 [[진골]], [[6두품]] 등 다단계로 나뉘던 귀족 체제를 1귀족체인 세족 즉 귀족으로 축소시키고, 신라의 중류에 해당되는 2단계 계급인 5두품, 4두품 계급을 향리로 만들었다. 평민 또한 3단계이던 체제를 양민과 향·소·부곡민 2단계으로 하고, 천민은 1계급으로 하게 됐다. 물론 고려왕조가 간략화한 신분제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문간의 격의 차이는 계속 존재했지만 그것이 신라 때처럼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동적이라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주로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태조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사람들이 세족, 끝까지 도운 병사들의 경우는 중류인 하급 관리 즉 향리층이 됐다. 반면, 중립을 지킨 쪽은 양민이 되고, 반기를 든 쪽은 향, 소, 부곡민 아예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은 노비가 됐다. 정리하자면 계급은 귀족 - 향리 - 양민 - 향, 소, 부곡민 - 노비이다. 전왕조에 비해 계급의 숫자가 줄어들어 안정적으로 정리가 된 듯 보이나, 문제는 고려 초만 봐도 구성원들의 신분의 배정이 생각만큼 고르지 못하고, 또한 줄만 잘타면 배정이 이상했기에 신분의 유동이 매우 이상하였다. 그렇기에 본래 성씨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사람들이 성씨를 받을 때[* 이를 사성이라고 한다.] 신분의 배정이 매우 불안정했다. 예를 들면, 전쟁 포로나 반역자 등 노비가 될 사람들이 전답과 노비를 받고 귀족이 된다던지 중립을 지켰다던지 하는 노비가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전답을 뺏기고 노비가 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계급의 배정이 매우 엉망이었다. 반면 신라는 꽤 혹독하기 그지없는 골품제긴 해도 [[대물림]]되기에 계급의 유동 문제는 없었다. 탈락하면 또 탈락한 계급대로 대물림이다. 이는 신라를 망친 [[골품제]]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 때는 [[화백회의]]로 대표되는 진골의 경우 권한이 매우 강했다. 그래도 [[삼한일통]]의 업적을 자부한 문무왕과 그 뒤를 이어 신라 최고의 철혈 군주였던 [[신문왕]]까지는 왕의 권한이 강화되어 진골귀족의 반란에서 안정적이으나 96각간의 난 이후는 왕족들간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왕족들간 반란이 잦아지고 귀족층의 투쟁이 강화됐는데 이런 권력 쟁탈전은 6두품 이하의 하위 귀족이나 지방세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중앙 권력이 막강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주로 엎치락뒤치락했던 신라 정쟁의 특성상 이후 고려왕조에 비해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오히려 적었고 반란이 일어나도 [[김헌창]], [[김범문]], [[장보고]]와 같이 조기에 진압하는 등, 9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태생이 호족연합체 같은 형태로 시작해 지방세력의 세력이 강하던 고려왕조 초기보다도 중앙의 지방 통제력은 오히려 더 강한 측면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